있을 법한 모든 것
🔖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들 또한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판단과 분석이 개입하여 나오는 결론인 경우가 많으므로, 그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적절한 속도와 높낮이를 지닌 음성, 침묵과 호흡을 동반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동안, 존재의 기반이 흔들린다.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고 나서야 사람들은 삶이,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앞서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통해 열리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림자 속에 사람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원할 때는 그림자 속 사람의 손목을 잡아당겨 끌어내야 속이 시원해진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지하고 파악하며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와, 소유 내지 임의 처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파악은 손으로 쥐는 것이지만 그것을 놓아야 할 때를 모르거나 그것을 손안에 쥔 그대로 잡아 터뜨릴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님을, 대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림자 사람에게는 얼굴을 감추고 싶어할 권리나 자격이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 이때 1은 자신을 꼭 닮은 또다른 1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투신하듯이 다가선다. 1은 마침내 그와 함께 11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둘이 마주쳐 막 11을 이루었다고 느끼는 순간, 1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단 하나 있음과 같아지며, 수많은 단 하나가 복제되어 더 큰 단 하나의 일부를 구성한다. 서로에게 닿는 순간 1의 눈앞에 무수한 없음의 갈림길이 거미줄처럼 펼쳐지다가 한데 뒤엉켜 미로를 닮아간다. 1은 지금까지 1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모습이 실은 0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러나 다음 순간 또다시 0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된다. 마주한 두 장의 거울 사이에 우연히 낙하한 1 또는 0이, 서로의 모습을 반사하며 그것을 자기라고 인식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던졌다가 떨어뜨린 동전이 두 손을 펼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앞면인 동시에 뒷면인 것처럼, 0 또는 1은 0이자 1인 모습을 영원히 번복하고 변주한다. 이 우주에 물리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어떤 힘도, 이 손바닥을 비틀어 열 수 없을 것이다. 00 01 10 11은 예정된 계산이 아닌 즉흥과 충동으로 이루어져 광기를 품고 널뛴다. 우리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고 살면서 죽어가는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하여, 상상에서만 결합과 증식이 가능한 합성어와 파생어를 무한히 낳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든 되도록 하자. 이 세상에 기입되는 단 하나의 문장, 그 종지부에 찍히는 부호라도 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모습으로 동시에 조우해야 한다. 이 조우의 중첩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설령 이유가 거세되더라도 존재 그 자체이자 전부이고, 무의미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의미임을 증명하는 파동이다.
산산조각난 신의 찻잔이 우주에 흩어져 별이 된다.
1/들은 당신이 기다리는, 동시에 누구도 원치 않을 0의 총합이다.